연재소설

[The Core] 오래된 골목

[미래소설] The Core 2025. 1. 19. 14:39

 

 

 

 

 

2. 오래된 골목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간절함 때문이지”





스트라우스가의 만물박사 프링글은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의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오면 늘 그랬듯, 들고 있던 맥주잔을 탁자에 내리꽂으며 눈을 크게 뜨고 사방에 속사포처럼 침을 튀길 준비를 했다.
 




“18.44m의 먼 거리에서도 시속 160km의 야구공이 정확하게 포수의 가슴팍에 꽂히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1초가 되지도 않는 찰나의 순간에도 도루나 관객의 야유와 같은 것들이 항상 투수를 괴롭히지.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위험이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인간의 몸이야. 사람이 정확히 같은 각도와 힘으로 투구를 반복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조금만 힘을 더 주어도, 조금만 팔꿈치가 빠지더라도 던진 공이 도착하는 위치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단 말이야. 하지만 투수들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대한 몸짓을 매 구 반복하지. 

그것은 어떤 물리학이나 신경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야. 말하자면… 일종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


프링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수도 있었으나 옆에 있던 그의 동료 브라켓이 그의 빈잔에 맥주를 따라주는 바람에 튀어나온 눈을 도로 집어 넣으며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Bar내에서 그의 말에 동의하거나 주의 깊게 귀담아 듣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이 듣기 거북해 한사코 말리거나 방해하는 이도 없었다. 그저 퇴근길의 막힌 도로 위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처럼 그의 연설은 그들에게 따분한 지저귐이었다. 


“결국 매 순간의 투구는 찰나의 간절함이 이룬 결과물이라는 거야. 그 간절한 의지가 기적과도 같은 연속의 스트라이크를 만들어 내는 거지. 우리는 이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하지. 마음속으로 스트라이크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낼 수록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까워진단 말이야. 아주 구체적이고 반복적일수록 그 끌어당김은 더욱 강해지지.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이를 테면 , 공개된 비밀과도 같은… 그런 것이야!”


프링글의 연설이 막을 내린 듯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맥주잔을 깨끗이 비운 뒤 까끌까끌한 수염 사이로 흘러나온 맥주를 손등으로 쓸어 닦으며 일종의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자 어디선가에서 홀로 기분 나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매우 훌륭한 연설이야. 얼마전 8살된 내 조카가 책에서 읽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군. 이봐 할아범. 근데 어째 할아범은 자기 일에서 만큼은 간절함이 없는 것 같아. 매번 쏘는 총알이 희안하게 광인 머리통을 벗어나 사람 몸통을 향하니 말이야. 아! 아니지! 이거 어쩌면 할아범이 바라는 간절함이 따로 있는 거 아닌가? 푸하하하”


맨 뒤쪽 테이블에서 프링글을 지켜보던 허만이 그를 겨냥한 듯 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조롱하자  주변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프링글은 그 말에 얼굴이 시뻘게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짓눌렀다.

 

 

 

 

 


스트라우스가 127번 모퉁이에 위치한 '오래된 골목'은 퇴근길 헌터들의 성지였다. 퇴직한 배너씨가 운영하고 있는 그곳에서는 헌터들이 한데 모여 술을 마시며 정보를 교환했다. 이곳이 주변 술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연중 무휴로 운영된다는 것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메뉴판 같이 생긴 슈퍼 히어로 리스트가 걸려 있다는 것 정도였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거친 손님들을 받는 가게였지만 단 한 차례의 싸움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봐 프링글. 그만 기분 풀고 한잔 받아. 허만 저 놈 독설이 뭐 하루 이틀인가. 신경 쓰지 말고 기분 좋게 술이나 먹자고.”


프링글과 같은 팀인 그보다 다섯 살 적은 브라켓이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지으며 맥주를 따랐다. 그들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헌터 생활을 한 백발 노장들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젊은 날의 혈기만 믿고 까불고 있군. 소싯 적엔 저런 놈들은 깜도 아니었는데. 쳇. 나이가 웬수군”


“아무렴. 젊을 때야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 우리들 보다 시간이 더 많다는 이유로 말이야. 헌데 저런 놈들 특징이 뭔 줄 아나. 그보다 더한 시간을 줘도 어김없이 이 술집을 찾아와 내 주머니를 채워준단 말이야.”


오랜만에 바텐더를 맡은 술집 사장 배너가 프링글에게 새로 딴 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공짜 술에 아까까지만 해도 열이 올랐던 프링글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더구나 아까 먹었던 술보다 더 시원하고 맛있는 술이라 그런지 화가 금방 씻겨내려가는 듯 했다.


“이봐. 앤더슨. 자넨 절대 저런 무리들과 엮여선 안돼.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야 이제 인생을 즐길만큼 즐겨 언제 죽어도 아쉬울 게 없지만 말이야. 우리가 '워로드'와 같이 전설적인 인물은 아니더라도 말이지. 여지껏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일을 업으로 하고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라구. 허만 같은 놈들은 언젠가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나기만 하면 제대로 상대도 못해보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껄? 저런 놈들을 숱하게 봐왔어. 중요한 것은 말이지.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가 아니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인 것이지.”


어느새 마음이 풀린 프링글은 또 다시 철학을 드리밀며 옆에 있는 긴 코트를 입은 젊은 용병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뜬금없이 지목된 것에 당황한 듯 눈썹을 높게 치켜 세우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민망한 듯 웃으며 프링글을 향해 오른손에 든 맥주잔을 들었다.


“이봐, 저 친구는 걱정말라구.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실력만큼은 최고일 거야. 벌써 몇 달째 슈퍼 히어로 리스트에 이름이 걸려있으니 말이야. 거기다 저 친구가 맡은 일은 죄다 버브킹(참가한 헌터들이 다수 사망해 등급이 상향된 사건) 건들 뿐이라고."


“겸손한 친구 구만. 그래 언젠가 저런 친구를 본적이 있었지. 조용조용히 크고 굵직굵직한 일만 혼자서 처리하던 녀석을... 음... 칼... 그래! 칼 브레이커! 맞아. 그 녀석이었지. 녀석도 꽤나 음침하게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던 녀석이었는데. 다들 그 친구가 워로드의 뒤를 이어 '명예의 전당'에 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 뭐... 이것도 20년이나 더 된 옛날이야기군. 배너! 오늘 술 잘 먹었네!”


프링글은 주섬 주섬 장비를 챙겨 술집을 나왔다. 바람이 불어 쌀쌀한 날씨에 얼굴빛이 붉게 피어 올랐다. 


**************


프링글이 퇴장한 지 맥주 한잔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큰 바람이 휑하니 불더니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입구에 들어섰다. 그의 키는 2미터를 훌쩍 넘겨 천장이 닿을 듯 말 듯했고 짧게 깎은 머리는 마치 군인 같았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허만 무리도 남자의 모습을 경계하듯 계속 주시했다. 바텐더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배너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늘 먹던 것을 주문하듯 손가락 하나를 치켜 세웠다. 조명에 들어난 남자의 얼굴에는 왼쪽 눈썹부터 오른쪽 뺨을 가로 지르는 굵게 패인 상처가 보였다. 배너는 남자 앞에 500cc 맥주 한 잔을 내려놓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1초 만에 말끔히 비워냈다. 


“어떤 상놈의 자식이 자꾸 내가 노린 일감을 먼저 채가는 것 같아. 양념을 다 쳐놨는데 이상하게 꼭 마지막 총알이 내 것이 아니야. 젠장. 어이. 이거 니꺼 아니냐?”


남자는 오른손으로 크게 탁자를 내리쳤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 피가 묻은 은빛 총알 3발과 빈 탄피가 놓여져 있다. 앤더슨은 탄피를 흘깃 쳐다보곤 다시 맥주를 마셨다. 남자는 앤더슨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본 뒤 다시 탁자 위에 놓인 탄피 중 하나를 꺼내 유심히 살펴보았다. 금색 구리 재질의 탄피 밑바닥에는 뇌관을 중심으로 바깥 원을 따라 'Nuckle Bomb' 이란 음각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근데 말이야. 최근에 예비용으로 산 라이플이 불량인 거 같아. 총을 쐈는데 도통 총알이 보이지 않아. 이거 총알이 도대체 어디로 샌거야!”


오른쪽 옆구리에서 꺼낸 20센티미터 길이의 긴 은색 총이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났다. 총열에는 'Nuckle Bomb' 이란 글씨가 음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총을 살짝 기울여 탄창을 꺼내자 여섯개의 약실 중 세 곳이 비어있었다. 


“어라? 총알이 딱 3발 비네. 그럼 이 총알은 내가 쏜 건가? 뭐야? 그럼 내가 잡은거였잖아! 어쩐지 총알이 낯이 익다더니. 푸하하하!!!”


'빌벤의 주먹쟁이' 맥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이마를 한번 탁 치고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는 2년전 독일의 빌벤에서 캠밸사 프리드만의 소개로 이곳 프라모로 건너왔다. 첫 임무에서 네피림(몸집이 발달한 광인)을 상대로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이 그의 커다란 체구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유수의 헌터들로부터 같이 조인하기를 권유받았지만 굳이 조력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계속 혼자 다니고 있었다.


“이봐. 앤더슨. 요즘 너무 해이해진 거 아닌가? 이러다 슈퍼 히어로 리스트에서 이름이 떨어지겠는걸. 날 앞지르진 못하더라도 내 발목을 잡진 말아야지 안 그래 파트너?”


맥이 커다란 손으로 앤더슨의 등짝을 치자 쥐고있던 맥주잔에서 맥주가 튀어나와 셔츠에 젖었다. 앤더슨은 아무 말 없이 배너가 건넨 티슈를 받아 셔츠를 털어댔다. 떠돌이 맥이 유일하게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헌터가 바로 앤더슨 이었는데 1년 전 표트르제 거리에서 광인과 난투를 벌이다 위험해진 순간에 앤더슨이 쏜 총알이 광인의 머리통을 꿰뚫어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 사건을 두고 그는 앤더슨이 다 잡은 사냥감을 가로챘다고 투덜댔지만 알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그가 밉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를 가리켰다. 초저녁부터 술을 마셔대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허만 일당도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다. 맥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벌써 24번째 잔을 비우고 있었다. 바에는 배너를 대신해 야간 바텐더가 찻잔의 술병을 하나씩 꺼내 먼지를 닦고 있었다. 


“세기 말이라는 단어가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군.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사람이었던 것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는 머릿 수만큼 돈을 받아가니 말이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합당한 보수를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것은 로마시대 검투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군. 하긴 그것이 단지 유희를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남은 사람의 안전을 위한다는 좋은 명분이 있으니 조금은 더 나아보이는건가. 

하지만 광인 또한 사람이었을텐데. 과연 그에게 남겨진 친구와 가족들 역시 그의 죽음에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인간에게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을 텐데. 이렇게 사람을 고용시켜 미친 개를 쫓아 사냥을 하듯 사람을 처리한다는 것이 과연 존엄한 일인가. 어째서 그들은 수 십세기 동안 의학을 발전시키고 수많은 불치병을 고쳐왔으면서도 광인에 대해서 만큼은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고 단정짓는 것인가. 어쩌면 세상에 필요한 사람보다 죽어야 될 사람이 많아 방치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미 그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는건지도...”


가게 구석에서 TV를 보며 조용히 술을 마시던 한 사람의 말이 조용해진 가게의 정적을 타고 모두의 귓 속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맥은 이미 25번째 잔을 비우고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받고 잠이 들었다. 


“의심하지 않으면 거짓은 진실이 되어 버린다! 진실을 아는 소수만이 다수의 행복을 독식하게 되지. 그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리고 그 행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의심하는 것 또한 인간의 권리지. 하지만 권력 앞에 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구나. 더구나 다수의 바보들은 자신의 행복이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의심하는 것을 그저 소란스러운 일로 생각하며 경멸해 버리지. 그래서 거짓은 무관심을 방패 삼아 진실을 잔혹하게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건 조롱과 비웃음 뿐...” 


앤더슨 역시 몇 잔의 술로 생각이 멎어버린 상태였다. 그에겐 이렇게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단지 언젠가는 자리를 뜨고 다른 사람들처럼 차가운 바람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 꽤나 귀찮게 여겨질 뿐이었다.


적막한 시간을 깨고 의식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도록 윤활유를 부은 것은 호주머니에 있던 전화기에서 울린 작은 진동음 때문이었다. 진동음은 마치 재난문자를 알리듯 테이블 곳곳에서 울어댔다. 




[사건]
장소 : 폴 스트리트 사거리
대상 : 30대 남성



앤더슨은 테이블 위에 술값을 두고 일어섰다. 맥은 완전히 곯아 떨어졌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건 지역을 향하는 헌터 무리의 뒤를 따라 앤더슨도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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